새 뮤 엘 베 케 트
연극 무대
승부의 종말 | 행복한 나날들 | 고도를 기다리며
새뮤엘 베케트의 희곡 세개를 같은 시기에 동일한 형태와 시각적 언어로 디자인 된 세개의 무대에 올려 하나의 시즌으로 묶는 프로젝트이다. 관객들은 시즌권을 구입해 다른 날, 혹은 같은 날 베케트의 세 희곡을 관람할 수 있다. 이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베케트의 희곡들과 베케트의 사상을 좀 더 잘 경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하나만 보면 이해가 안되던 것이 같은 사상을 담은 세가지의 극을 봄으로서 이해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베케트 사상 분석
베케트 연극 작품들의 일관된
특유한 극적구조
베케트의 “삶과 죽음”
철학을 담은 세계관
규정지을 수 있는 공간의 개념에 대한 거부
베케트의 연극은 등장인물들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완젼히 폐쇄된 보잘것 없는 작은 공간에서 진행된다. 전통극의 논리적인 공간, 즉 입구와 출구가 있거나, 경계선을 그을 수 있어 규정지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또한 사회적 삶의 흔적들도 보이지 않는다.베케트의 극중인물은 그 공간에 갇혀있는 듯, 그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이면서도 막상 자기가 있는 곳을 마음대로 떠나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하다. 이렇게 출구도 없이 폐쇄된 공간은 그렇다고 어떤 구체적인 특정장소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생활을 영위했던 곳이 실제로 어디건 간에 그곳에 아무런 필연적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며 삶을 영위해 나가는 곳이라는 개념에서는 여기나 다른 곳이나 아무 차이도 없는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또한 베케트 무대 안의 시간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다. 무대 안의 공간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공간, 즉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 (과거-현재-미래의 전개)이 불가능한, 고정되어버린 시간이 쌓이는 공간이다.
등장인물의 수동화 현상
베케트의 인물들은 기존의 능동적인 연극 등장인물들과 달리 수동적이다. 죽음, 죽음으로 끌고가는 무자비한 시간 또는 그런 굴레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오브제로 전락한 인간은 쌍을 이루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시간의 흐름에 굴복하여 육체의 파괴, 나아가 사고의 해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끊임없는 존재에 대한 탐구
무한한 허공 속에 방치된 우리들 인간은 자신의 고독을 자각하게 되고 허무를 느끼게 되어 견딜 수 없는 침묵에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된다. 그것을 면하기 위해서 자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역할을 갖거나 허구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확인한다. 말은 단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 그 속에 담겨있는 내용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고 오로지 말한다는 행위 그것만이 중요하다. 말한다는 행위는 인간이 순간순간의 허구를 통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부정적인 유토피아
인물들은 불구가 되어있고 자연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회색이고, 역사는 종말에 이르렀다. 아직도 기어다니고 날아다니는 것들은 살아간다기 보다는 시들어가면서 종말을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제멋대로 되어버린, 항상 무의미한 행동들로 시간을 때려잡는다. 그리고 살아남은 것들간의 소통은 독백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
인간은 언제나 실제의 움직임보다 선행하여 의식이 먼저 활동을 하게 마련이며 좌절된 한계가 많으면 많을수록 외적인 행동보다는 내적행위가 더욱 왕성해진다.
상실된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절망적이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자들이다. 하지만 위축되고 피폐된 상태에서도 그들은 그들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알고 싶어한다. 그들은 인간들을 다시 붙잡아 매고, 현실감이 사라진 세계를 다시 현실화하고 완전하게 만들어줄 어떤 원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디자인요소
같은 형태의 무대 3개
같은 형태와 시각적 언어로 3개의 무대가 블랙박스 안에 지어진다. 이는 베케트의 인간관과 세계인식이 세 연극에 일관적이게 표출되는 것에서 영감을 얻은것인데 각 극의 이야기와 등장인물은 다를지언정 베케트의 사상은 동일하다. 다소 난해할 수 있는 베케트의 연극들일지라도 관객들은 같은 형태의 무대 세곳에서 세번에 걸쳐 접하면서 베케트의 사상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구조는 베케트 연극의 등장인물들의 특징에서 영감을 얻은것으로, 출구와 입구가 벽과 같은 재질로 마감되어 보이지 않고 벽도 바닥과 같은 재질로 되어 완벽히 폐쇠된 느낌을 준다. 등장인물들이 극이 일어나는 공간에 같혀 떠나지 못하는 느낌을 관객들도 함께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사방이 막힌 무대에 직접 들어감으로써 관객들은 등장인물과 동일시되고 호흡하며 극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된다.
네모 형태의 막힌 공간
세개의 무대는 모두 다른 느낌의 콘크리트 재질로 마감되어 통일감이 있으면서도 각 극에 맞춰진 차별된 무대가 된다. 콘크리트의 냉기와 거친 질감이 주는 날것 그대로의 느낌은 베케트 극 특유의 황량하고 정의할 수 없는 공간 설정을 극대화하고 베케트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의 날것 사태의 삶을 관객들이 마주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날것의 생생함에 관객들은 낯설음을, 잔혹함을 느끼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삶의 본질을 직시하고 존재의 심연을 떠올리게된다. 이런 상태에서 독백같이 주고받는 등장인물의 대화는 관객들이 내면과 소통하고 삶과 시간에 관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구하는 의식의 능동적인 참여를 부추긴다.
콘크리트 마감
무대 중심에 있는 원형무대는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 이는 등장인물의 일상이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는것과 움직여도 결국 지금 있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요소로서 사용된다. 또한 관객들이 단조로운 구조의 극을 끝까지 집중할 수 있도록 약간의 재미요소를 더하기도 하며 관객들이 어디에 앉아있던 등장인물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돌아가는 원형 무대
관객들은 무대에 직접 들어가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는다. 기존의 극장에 정해져 있는 좌석에 앉아 딱딱한 자세로 극을 관람할 때와 달리 제약없이 자유로이 앉을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열린 사고로 극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된다. 또한 관객이 없는 공간을 무대로 삼아 극을 진행하는 등장인물들은 관객 바로 옆에서 독백과 같은 대사를 전달하게되고, 이는 관객이 등장인물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해준다.
바닥에 앉는 구조
행복한 나날들
시놉시스
배경
시사점
죽음에 대한 부정
위니와 윌리가 흙더미에 묻혀 서서히 빨려들어가는것은 인간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죽음으로 다가가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물건과 동반자를 통해 행복했던 과거를 다시 살고 매일 매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흘러가는 시간과 서서히 죽고있다는 현실을 부정한다. 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은 점점 죽음에 다가가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삶에대한 의지를 잃지않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의 공허함
위니는 윌리가 대답을 거의 하지 않고 들어주는 이가 더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말한다. 과거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회상하는 말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에 대한 의미없는 말을 하면서 마치 평범한 일상을 살고있는 듯한 착각을 한다. 하지만 결국 말이 바꿀 수 있는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말이라는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보여준다.
인물
중년의 부부 윌리와 위니는 어딘지 알수없는 광활한 대지의 흙더미 위에 묻혀있다. 그들은 쨍쨍한 해를 피할 어떤 그늘도 없이 예전의 기억을 추억할 물건들과 서로에 의지한채 하루 하루를 보낸다. 위니는 뒤에 있는 윌리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 각자 일상의 의식을 행하며 언젠가 이 상황에서 벗어 나리라는 근거없는 희망을 가지고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낡고 떨어지며 점점 더 깊이 흙더미에 묻히면서 무력하게 운명을 마주한다.
흙더미의 언덕배기, 작렬하는 태양
위니
메마른 땅에 묻혀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무한한 긍정의 힘으로 하루 하루를 이어가는 인물이다. 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한 것은 묻지 않은채 매일 매일 자신의 뒤에 있는 남편의 존재에 위안을 받으며 의례적인 일상의 의식들을 행하며 살아간다. 위니에게 일상의 의식은 현재 상황을 잊게하고 지난 날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주는 것인 동시에 존재 이유이다.
윌리
아내 위니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윌리는 수다스러운 위니와 대조되는 과묵한 인물이다. 위니처럼 과거에 묻혀 현실을 무시한채 하루 하루 살아간다.
승부의 종말
시놉시스
배경
시사점
순환되고 반복되는 시작과 끝
인간의 존재는 시작과 끝의 순환과 반복이다. 이 극의 등장인물들은 다 하나같이 “끝”을 기다린다. 햄과 나그, 넬은 죽음을 기다리고, 클로브는 햄과 이 알수없는 공간에서 해방되는 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끝은 오지않고 계속 똑같은 일상이 반복될 뿐이다. 나그, 넬, 햄, 클로브는 삼세대에 걸친 가족으로도 볼 수 있어 인간의 삶이 반복되는것을 의미한다.
고독, 공허함, 의존성
나그와 넬, 햄과 클로브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자신의 절망스러운 상황안에 격리되어 진정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고독을 느낀다. 햄과 클로브는 서로에게 의존하지만 필요에 의해서일 뿐 사실은 서로를 혐오하며 떠나고 싶어한다. 이 표면적인 관계는 그들을 더욱 고독하고 공허하게 만든다.
인물
햄, 클로브, 나그, 넬은 어느 황량한 실내공간에서 살고 있다. 벽면 높은 곳에 달려있는 조그만 두 개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세계는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황폐한 모습이다. 눈이 멀고 몸이 마비된 햄은 휠체어에 앉아서 클로브를 노예처럼 부리며 시중을 받고 있고, 햄의 부모인 나그와 넬은 쓰레기통 속에 살면서 가끔씩 머리를 내밀고 과거의 추억을 되뇌일 뿐이다. 햄은 끊임없이 무의미한 명령들을 요구하고, 클로브는 계속해서 자신이 떠날 것임을 선언하지만 떠나지 못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그들의 행위는 놀이처럼 반복된다.
텅빈 실내, 잿빛 조명
햄
앞을 볼 수 없고 휠체어를 타고 있다. 클로브의 도움 없이는 휠체어마저 움직일 수 없다. 권위적이지만 클로브를 통한 행동이 주가 되며 권력관계에 상위에 위치하지만 하위관계인 클로브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순을 보인다. 폐쇄된 공간에서 의미 없는 능력이지만 그는 권력유지를 원한다.
클로브
햄의 종이자 수양아들. 햄에게서 받는 학대 때문에 그를 증오하며 햄에게서 떠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클로브는 햄을 떠날 수 없으며 이곳을 떠나서도 살 수 없다.
나그 & 넬
햄의 부모. 쓰레기통에 쳐박힌 채 과거를 잠겨 살아간다. 넬은 후에 죽은 것으로, 나그는 점점 죽어가는것으로 암시된다.
고도를 기다리며
시놉시스
배경
시사점
환상에 의존하는 인간
고고와 디디는 고도라는 환상에 기대어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무의미한 삶에서 남을 통해, 의미없는 행동을 통해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고도를 언제부터 기다렸는지도 모르고 진짜 오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기다린다. 고도가 언젠가 올 것이라는 무의미한 희망이 이들을 계속 살게한다.
시간의 불확실성
그들은 영원히 반복되는 불확실한 시간에 갇혀 매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행동을한다. 시간은 기억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고 기억은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데 시간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한다.
인물
황량한 언덕, 나무 한 그루, 그곳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 두사람이 언제부터 고도를 기다려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그들 앞에 포조와 그의 짐꾼인 럭키가 등장한다. 네 사람은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갖가지 놀이를 만들어내고, 마침내 저녁이 되자 고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년이 등장한다. 목이 빠지게 고도를 기다리던 고고와 디디에게 소년이 다가와 고도는 오늘 밤 대신 내일 온다고 말해준다. 어제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 모를 하루는 저물어가고 그들은 계속해서 고도를 기다린다.
나즈막한언덕이 있는 시골길. 나무 한그루
블라디미르 (디디)
이 희곡의 인물 중에는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 외에는 적극적인 전략을 사용하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려고 하는 의지는 매우 높다.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떠나지않고 에스트라공과 함께 놀이와 체조, 평균잡기, 말장난 등을 하면서 심심함을 달랜다.
에스트라공 (고고)
블라디미르와는 달리 행동형이다. 그러나 이 행동에 사고가 결여되어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삶에서의 희망인 고도 기다리기는 그에게는 허상일 뿐이다. 친구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리기 때문에 그 역시 하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고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블라디미르에게 물어보지도 않는다.
고도
사람들은 그를 기다린다. 그가 오는 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는 쉽게 그들에게 가지 않는다. 그러나 갈 것이라고 희망은 준다. 실제로 그가 있는지 없는지 형체를 드러나지 않는다.